
카메라의 용도는 당연히 사진을 찍는데 있다. 그래서 SLR 카메라를 사는 일은 한참 나중에나 있거나 혹은 인연이 없는거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여자친구라도 생기지 않는 한은 쓸일이 없지 않겠냐 그런 생각. 그래놓고 어쩌다 DSLR도 아니고 필름 SLR 카메라를 샀을까. 보급형 DSLR 보디 하나 가격에 중고로 28/50/135mm 렌즈 구성에 바디까지 살 수 있어서 한번에 마구마구.
전공이 전자전기 - 물론 소프트웨어를 전공하지만 - 라서 그런건지, 워낙 전자기기의 세상이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냥 내제된 취향의 탓인지 몰라도 기계가 좋다. 군대에서도 오늘 밤처럼 영하로 기온이 떨어졌을 때 소총이 아무리 무겁고 차가워도 그 합리적인 기계의 매력 때문에 차마 미워할 수 없었던 것처럼. (이 증상이 심해져서 나중에 라이카 M3나 M2를 산다고 난리를 치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 하지만 DSLR 가격과 라이카의 가격이 얼추 비슷한 것같은데?!)
그래서 기왕이면 완전 기계식 카메라 전지 없이도 동작하는 니콘 F나, 펜탁스 MX를 갖고 싶었지만 MX는 물건이 없었고 굳이 기다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서 바로 ME Super를 샀다. MX도 그렇지만 사실 전자기기는 노출계 뿐이므로 예비 배터리만 착실하게 준비해두고 시베리아만 가지 않으면 별 차이는 없을 것같다. 그렇다고 뇌출계를 쓸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다. 내장 노출계가 없으면 따로 노출계를 마련해야하는데 그게 오히려 불편한 노릇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MX여도 전지는 필요하다는 결론.
ME super 역시 노출을 제외하면 모두 손으로 만져주어야 한다. 전자기기가 아닌 그냥 기계의 카메라! 이건 불편하기보다는 오히려 상쾌한 경험이다. 측광 스팟에 맞춰 가면서 AF 잡는 시간 동안에 렌즈가 지직 거리면서 돌아가는 것도 없고 사진을 찍고 난 다음에 플래시 메모리에 저장하는 시간도 없다. 대신에 MF로 초점을 맞추고 필름을 감아야 하지만 왠지 이것이 스트레스로 느껴지지가 않는다. 오로지 셔터가 열렸다 닫히는 그 시간만이 사진을 찍기 위한 '소모 시간'이다. 덜컥하는 셔터음. 카메라의 셔터음은 역시 FM2의 그것처럼 되야 한다는 무슨 의무감이라도 있었던 것같은데 조용한 방에서 찍어보면 이 녀석의 셔터음은 정말 문을 닫는 것처럼 '덜컥' 하는 소리가 난다.
친구들이랑 놀러가면 무겁고 거추장스러운 DSLR은 내가 맡고, 사진도 내가 찍는 일이 많았지만, 그리고 어깨너머, 그리고 책장으로 대략적인 지식은 알고 있었지만, 처음으로 써본 MF나 단렌즈들을 바꾸어 마운트 해가면서 느끼는 화각은 그간 오해했던 것, 미처 알지 못했던 것들을 하나씩 알게끔 한다. 아 화각. 0.95를 넘는 배율의 뷰파인더에 50mm를 물렸을 때의 느낌이란. 이런걸 본 적이 없는데 50mm가 기본 중의 기본인지 어떻게 알겠냐.
매체가 필름이라는 것은 현상/인화 값(필름 값은 음료수 값보다 싸니까 무시)보다도 결과물을 볼 때까지의 시간이 엄청 길다는 것이 크다. 가령 DSLR이라면 바로바로 찍고 조리개와 셔터스피드가 저장되고 결과를 확인할 수 있으니까, 공부하는 입장에서도, 그 순간을 무조건 잡아야되는 입장에서도 합리적이다. 필름은... 와 나는 36방짜리 필름 다 채우는데도 한참 걸리더라. 한 장, 한 장에의 신중함이야 당연한 것이겠지만 그 중 어느 한장이 정말 궁금하고 잘 나왔을까 걱정되고 이런 기분은. 결국 첫 롤에서 꼭 한장 건지고 싶었던 사진은 망했다. 왜 이게 망했나 그 순간 너무 급하게 찍어서, 어두워서, 조리개를 막 열어서 심도가 너무 얕았다고 대략은 기억하지만 정확한 이유는 모른다. 디카가 나오기 전의 사람들은 꼼꼼하게 기록하고 찍고 탐구하고 다시 찍고 제법 품이 많이 갔을 것같다. 나는 그렇게 성실하지는 않은데... 그리고 흑백필름도 몇 롤 사두었는데 흑백을 찍다가 칼라로 찍고 싶을 때 이럴때는 방법이 없으니까 막막하기만 할 것같다. 바디를 하나 더 갖고 있지 않는 이상. ISO야 말할것도 없고. 하나의 롤을 끼우고 마지막 한 장까지 책임지는 것. 이제까지 한방만 맞으면 된다고 난사했던 것과는 다른 방법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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