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x You - Coldplay


by -浪- | 2008/10/11 23:35 | 들으며 말하기 | 트랙백 | 덧글(0)

C급 경제학자의 기다림 - 괴물의 탄생


끔 책을 읽다 정서라는 것을 느낄 때가 있다. 주제나 분위기와는 다른건데 풀어서 직접 쓰진 않았지만 분명한 저자의 목소리, 혹은 마음. 그런걸 읽는 와중에 문득 문득 느끼곤 한다.

저자는 한국경제대안 시리즈의 마지막 권인 이 책을 대학생들이 읽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리고 스스로는 C급 경제학자를 자칭한다. A급 경제학자와 C급 경제학자의 차이는? '너넨 아직도 뭘 몰라' 라고 새로운 이론과 분석의 틀을 만들어낼 수 있는 사람이 A급, 이미 있는걸 가져다 쓰는데 급급한 정도가 C급. 그래서 자기는 뭐 하나 변변한걸 만들어내질 못했으니까 C급이라고.

나는 이게 그냥 학문에 대한 학자로서의 입장인줄 알았는데 그게 다가 아니었나보다. 만들려고 했던 것을 미처 다 만들어내지 못했기 때문에 그에 대한 자조의 아쉬움, 그리고 진짜 자존(나는 자존심같은 가치를 전혀 존중하지 않는다. 여기에서의 자존은 일반적인 자존심과 층위가 다른 가치이다.) 에서 나온 수식이 C급이었던게 아닐까.

경제학의 큰 줄기를 풀어낸 다음, 스스로의 가설을 풀어내고 그 언저리를 비추는 것으로 남아있는 문제를 누군가 풀어줬으면 좋겠다는 C급 경제학자의 희망. 그런 남겨둔 마음을 읽었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시장과 정부의 형성과 이론을 1장에서 설명하고, 양쪽 괴물의 사이에 자리한 미지의 영역을 탐사하고 가치를 매길 필요가 있다. 내가 탐사한 부분은 여기까지다라고. 가지고 있는 패를 넘겨주는 것처럼.

아무튼 새로운 이론과 분석의 틀이란 기존의 것과 다른 시각, 가치 매김의 차원을 마련하는 것이고, 때문에 가설과 가정을 세우는 것은 속담 그대로의 의미 이상으로 그러니까 '시작이 반 이상이다.'

인간의 역사가 보편성을 띄는지 절대적으로 그렇게 진행되어야할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시공간 속에 절대란 없고 더욱이 사람이 만든 이론의 프레임이 현실 세계를 온전히 담아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대세라는 거 실은 그렇게 유약하고 하릴없는 것이다. 심지어 지금 저 잘난 미국의 금융 경제도 오락가락하고 있는 와중 아닌가. 그렇기 때문에 아담 스미스도 마르크스도 케인즈도 절대가 아니고, 더 많은 눈과 더 많은 질문이 필요하다.

저자가 가진 새로운 분석의 틀로 한국의 경제사를 읽는 시도는 너네가 하는 소리 다 잘못되었다고 당당히 외칠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이기도 하지만, 이름이나 대세같은 것에 눈을 흐리지 말고 네 눈으로 직접 세상을 보라는 교훈이기도 하다. 그게 디테일의 의미로도 풀이될 것 같다. 촛불 이후로 펼쳐진 對 명박, 혹은 뉴라이트나 한나라당과 같은 구도들은 솔직한 이야기로 절망의 연속이었다.

사람들이 너무 쉬운 대답과 해결을 좋아하는 건지. 누가 나쁘다, 뭐가 나쁘다, 2mb가 다 그렇지 뭐. 노통의 실패는 모두 조준동의 탓이고 봉하마을에서 돌아와줬으면 좋겠다는, 그리고 삼성이 나쁘긴 하지만 삼성 없이 나라가 굴러가겠냐는- 그런 단편적인 이야기를 넘어서 무엇의 무엇이 좋고 무엇의 무엇은 나쁜 결과로 이어지고, 어떤 흐름이 무슨 결과를 낳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 각 사람, 사람이 자기만의 눈을 가지고 사유를 시작하는 것 그게 디테일이 아닐까 싶다. 이명박이 지금 잘못하는거 누가 모르는 것도 아니고 그걸 반사적으로 탓하는게 아니라 문제를 잘 들여다보고 나누어 생각하고 하나씩 실타래를 풀어가자. 그런 생각을 촛불 언저리에서 했다.

어쩌면 정말 당연한 이야기도, 정말 이상한 듣도 보도 못한 소리도 잘 골라내어 풀어보는 것. 그런걸 사유라고 해야할 것같다. 1945년 이후 한국 경제에 대한 저자의 분석은 여기 저기서 떠들어대는 것과는 다른 눈으로 과거와 지금의 세상을 읽어내는 방법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한강의 기적이니, 압축 성장이니, 독제니 하는 단편적인 프레임을 뚫고 하나씩 뜯어보고 따져내고 놓친 부분을 들여다보는 것으로.

그렇게 지금의 문제를 들여다보는 것. 그것이 모두가 입을 모아 떠드는 위기를 해쳐나가는 시작이 아닐까. 적어도 문제가 있다고 느끼고 그것을 풀어보고 싶다면 말이다.

by -浪- | 2008/09/27 15:08 | 책으로 말하기 | 트랙백 | 덧글(0)

아이들의 아이들의 봄에는 - 침묵의 봄


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은 환경 문제를 다룬 책 중에서도 고전 중의 고전이고, 새삼 읽어도 DDT를 비롯한 농약이 나쁘다는 이야기에 다름아니다. 생태계의 복잡하고도 아름다운 관계 그 어느 부분이 깨어지는 순간 어디까지 망가질 것인가에 대한 경고. 라고 말해봤자 아 그렇구나 하고, 이제와서 지난 세기의 경고는 다들 잘 알고 있는 지난한 소리에 불과하다. 그래 지겹기도 하겠지.

그렇다고 환경을 지키기 위해서 모두가 열심이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라서, 농약과 병충해 이야기라면 여전히 GMO 제배하고, 유전자 조작한 작물은 특정 병충해에 약하다고 농약을 써야하는, 카길을 비롯한 몇몇 기업이 세계 곡물 시장을 꽉 쥐고 있는 지금이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인간의 욕심이 미련해서? 자본의 성질이 본래 그러하니까? 그게 아니라 우리가 질문을 잘못 들은거 아닐까. 침묵의 봄이라는 제목을 시적이라고 칭송하기 전에 이를 낳은 감수성을 보자. 시인을 어느 시인의 말마따나 단지 단어를 그러모으는 이로 만들고 싶지 않다면.

환경을 보전해야한다. 그 이유는...? DDT가 흘러 흘러 4명중 한 사람을 죽일 것이기 때문이라면 시적인 제목이고 나발이고 빵 터뜨리면 되잖아. '농약이 우리를 죽일 것이다.' 라던가.

침묵의 봄을 이에 대한 세련된 은유로 읽는 것과 또 다른 물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사소한 차이같아 보이지만 궤가 다른 접근이다. 그러니까 '정말 당신은 새도 지저귀지 않고 꽃도 피지 않는 봄 속에서 견딜 수 있겠냐' 는 단도직입적인 물음으로 말이다. 이건 아름다움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고, 사랑이나 예의에 대한 말이기도 하다. 혹은 측은지심과 통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지율 스님이 도룡뇽에 대해서 말했던 것처럼 말이다.

정말 멋진 것은, 사람이 선하기 때문에 측은지심을 갖는다는 맹자의 설명대로라면 그 선함이 기어코 우리가 세상을 파괴하고 기어코 우리마저 죽이는 것을 붙잡아 멈출 것이라는 사실이다. 작은 새와 도룡농을 살리는 것이 인간을 살리는 것이지만, 살기 위해 살리는 것이 아니라 살리고 싶어서 살리는 마음.

굳이 파운데이션의 가이아처럼 동, 식물의 마음을 이해하고 딱 필요한만큼만 잡아먹을거라고 오버할 것도 없다. 아니 생태계와 먹이사슬은 그렇게 사람의 생각처럼 돌아가진 않는다. 다만 나와 너로 구성되는 우리가 아닌 또 다른 느슨하지만 관계로 정의되는 우리를 생각하는 것. 그게 아이들의 아이들이 맞이할 봄이 만물이 소생하는 시간이게끔 할 것이다. 그녀는 이런 말을 하고 싶었던거 아닐까.

by -浪- | 2008/09/23 19:24 | 책으로 말하기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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